방앤리 :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들

유진상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그리고 공동체와 국가 간 경계들 안팎의 상호의존적 네트워크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넌-제로섬’ 해결방식에서 찾으려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즉, 이익-손해 방식 대신 이익-이익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호의존성이 전체적으로 증가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과업을 더 잘해낸다면 우리들도 더 잘하려고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며 서로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 빌 클린턴, 와이어드(Wired) 지 인터뷰, 2000년 12월i)

방앤리는 기술-편재적 세계의 쟁점들을 작업의 내용으로 다룬다. 초국가적 주체들이 지배하는 망-기반의 협동사회; 비-가시성과 유사-가시성으로 표면을 패턴화한 정보 및 데이터 기반의 세계 지각; 협력을 전제로 분산 및 공유 시스템을 지향하는 대안적 민주주의; 극단적 기술기반 비전에 입각한 목적론적 과학사관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세계를 규정짓는 이 수많은 패러다임의 레이어들은 불과 지난 십여 년간 구체화된 것들이다. 소위 ‘미디어아트’ 혹은 ‘뉴 미디어아트’라고 불려 온 ‘기술기반 예술’은 이제 ‘기술편재 사회’로 접어들면서 예술적 장르로서의 독자적 패러다임을 상실하는 대신 더욱 광범위한 창조적 생산의 범주로 전환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뉴 미디어아트’라고 부르는 장르들은 아예 ‘동시대 창조’와 같은 보다 보편적인 명칭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 분야의 예술적 접근이 더 이상 프로그래밍과 장치의 결합과 같은 기술-관습적 실천만으로 충분히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방앤리는 미술과 철학, 연극과 테크놀러지의 경계들을 따라가면서 작업해왔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포획해 나가는 야심 찬 테마들은 한국의 미디어아트 뿐 아니라 동시대 미술 지도 전반에서 중요하지만 매우 희소한 비평적 지점들로 다루어질 것이다.

프로토콜

방앤리가 일차적으로 현재의 세계에서 추출해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이다. 관습적으로는 그것을 자본이나 계급투쟁, 혹은 제국이나 포스트-포스트 식민주의 등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평행이론을 거론해야 할지도 모른다. 매번 새롭게 수많은 플랫폼들로 확장, 복제되는 초-국가적 기술-정치-산업 복합체들과 개개인의 참여가 극도로 강조되는 통신기술 기반의 초-다원 민주주의 사회에서 장래의 우리의 운명을 가시화할 수 있는 일관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협력과 토론, 조직과 분배의 사회적 합의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규범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할까? 우리는 유토피아를 너무 일찍 금기들과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지연되고 보류되어 왔을 뿐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세계의 접점들을 따라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방앤리의 작품들을 가로지르는 규칙들은 세 개의 키워드 즉, 넌-제로섬, 거실, 그리고 우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개념들은 애초에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다고 믿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넌-제로섬

로버트 라이트 Robert Wright는 2000년에 저술한 ‘넌제로 : 인류 운명의 논리학 Nonzero: The Logic of Human Destiny’에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보가 무엇보다도 ‘넌-제로섬’ 원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게임 이론(Game Theory)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제로섬(Zero-Sum)이란 한정된 자원에 대해 누군가가 이익을 취하면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는 손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관계를 가리킨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주인공인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John Forbes Nash Jr.)는 ‘내쉬 평형이론(Nash Equilibrium)’에서 서로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고려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경쟁자들이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힘의 평형이 이루어진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경쟁적 상황이 아닌, 누구도 손실을 보지 않고 공동으로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모두 손실을 볼 수 있는 상황을 넌-제로섬(Non-Zero-Sum)이라고 부른다.ii)  협업을 전제로 하는 방앤리의 정체성에서도 볼 수 있듯 협력과 토론은 이들의 작업 모두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방앤리의 작업들이 모두 혼합(composite)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부분들이 모두 상이한 경로들을 통해 주어진 공간에 병렬적으로 도착하거나 이를 통해, 마치 ‘카페트의 그림’처럼,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가장 적정한 넌-제로섬 체제다. 특정한 지점의 충만함이 다른 지점의 결여를 초래하지 않는다. 각각의 참가자들은 모두 예술에 다양한 경로로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세계’로 확대해서 보면, 갈등이나 부정은 선의의 ‘토론’과 ‘타협’을 통해 상이한 이득들로 변환되어 당사자들에게 재분배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관념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러한 이상적 토론의 장소는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다. 방앤리는 그것을 ‘거실’이라고 부른다.

거실 : 파견된 무대/Living Room : Dispatched Stage

다소 연극적인 톤으로 말해보자 : 여기에 거실이 있다. 이 거실은 사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차원으로부터 이 장소에 투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차원으로부터 이곳에 파견된 무대에 가깝다. 무대 위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두 개의 일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이 무대들 위로 카메라와 조명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의자는 곧 일어날 토론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이제까지 많은 전시들을 통해 방앤리는 거실을 만들어 왔다. 그들은 거실을 “이미지의 장소, 행위의 무대, 반전의 공간이며, 동시에 영화와 연극의 공간, 삶이라는 무대, 그리고 미디어라는 거울이 비추는 곳”이라고 말한다. 거실은 사적 자율과 공적 규율이 중첩하는 장소다. 이곳에서는 정치와 거래, 사적 교유와 가족들의 일상이 교차한다. 거실은 내부이자 외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획된 바깥’ 혹은 ‘바깥을 반복하는 내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거대한 덫, 깊은 자루, 정교하게 세팅된 장치이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유지하는 기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마치 마그리트의 “듣는 방 La Chambre d’Écoute”에 등장하는 사과처럼, 코끼리 한 마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코끼리를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소파에 누인 몸을 낮게 낮추고 거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의 공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부로 들어온 바깥 : 거실의 인간들은 주체할 수 없는 크기와 무게로 이 사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대해 토론한다. 코끼리는 그것의 크기와 무게로 인해 어느 순간 가시적 경계를 벗어난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것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으며, 우리의 시선을 파편화한다. 거실의 모든 이들은 이미 내부를 가득 채운 바깥을, 내부가 소멸된 바깥을 향해 앉아 있다. 이 코끼리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는 등장하지 않는 동물이다. 그것은 ‘친구’ (혹은 ‘동무’)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동물이며 ‘우정’의 범위를 벗어난 장소에서 난입한 존재다. ‘우정’으로 포획할 수 없는 과도한 대상이자, 평등하게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시선을 초과하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목적론적(teleonomic)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거실’은 이미 미래와 과거의 어딘가에 실현되어 있다. ‘거실’은 미증유의 유토피아적 공동체로부터 현재로 투사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엿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거실에서 코끼리를 내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 완벽한 코끼리가 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코끼리를 우리의 친구로 길들이는 것일까?

우정 : 막다른 골목/Friendship : Cul de sac

방앤리의 “Cul de sac”은 외부의 음향에 대응하는 인터랙티브 조명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긴 백색의 조명관들로 구성된 작품은 ‘Cul-de-sac’ 즉, ‘막다른 골목’ 혹은 ‘건배’라는 의미의 단어를 표시한다. ‘Cul-de-sac’은 직역하면 자루(sac)의 엉덩이(cul) 혹은 맨 밑바닥을 의미한다. 입구와 반대쪽에 있는 내부의 맨 끝 부분인 셈이다. 어떻게 해석하면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적 내부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외부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토론의 한계점이며 동시에 ‘우정’이 봉착한 최소한의 공유지가 될 수 도 있다. ‘자루’는 형태상 함입(invagination)의 벡터로 이루어져 있다. ‘Cul-de-sac’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성적인 의미 못지않게 내부의 생산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내부의 맨 끝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 그것을 가시화하고 앞으로 끌어내는 것이 방앤리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방앤리의 또 다른 조명 설치작업 “우정은 보편적인 것 Friendship is Universal”은 앞의 작품 “Cul de sac”과 반향을 일으키는 관계에 놓여 있다. 우정은 내부와 내부의 결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정을 통해 우리는 불가능한 존재의 가능성을 각자에게 분배한다. 블랑쇼는 우정의 최종적인 형태를 임종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사적 순간을 함께 경험하는 이 불가능한 분배의 행위야말로
‘공동체’의 마지막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iii)  공동체주의의 실패는 이 최종적 공동체를 계량하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측정할 수 없는 것, 데이터베이스를 넘어서는 것,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것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멸하는 대상의 옆에서 그것의 소멸을 바라보는 것뿐일 것이다.

방앤리의 작업은 기술편재 사회에서, 자본-제국의 세계 속에서, 보편적인 우정과 친구의 네트워크 속에서, 연출된 토론의 확장된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자유가 남아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작업은 뉴미디어를 넘어, 새로운 유형의 극적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나리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나리오는 세계의 극단적 추상성으로부터 토론의 자리로, 우정에 기반한 넌-제로섬의 협력으로의 전환을 실현시킬 구체적 해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도달하지 않고 있는 것들의 호출을 위한, 아직 그려지지 않은 세계의 그림을 가시화하기 위한, 우정과 협력의 조건들을 예측하기 위한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i) The more complex societies get and the more complex the networks of interdependence within and beyond community and national borders get, the more people are forced in their own interests to find non–zero-sum solutions. That is, win-win solutions instead of win-lose solutions…. Because we find as our interdependence increases that, on the whole, we do better when other people do better as well — so we have to find ways that we can all win, we have to accommodate each other…
— Bill Clinton, Wired interview, December 2000

ii) 예컨대, ‘수감자들의 딜레마 (Prisoner’s Dilemma)’는 범행을 함께 저지른 공범을 따로 신문할 때 각각의 용의자들이 죄를 자백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형량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해 따져보는 실험이다. 여기서는 누군가가 자백함으로써 상대방의 형량을 늘리고 자신이 석방되는 경우와 함께 자백함으로써 둘 다 형량이 조금 줄어드는 경우, 그리고 아무도 자백하지 않음으로써 증거불충분으로 최소한의 형량을 받는 경우 등이 제시되고 있다. 즉 넌-제로섬 이론에서는 결말이 강요되는 대신 협력과 우정에 의해 경쟁적 관계를 해소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혹은 모두 공멸할 수도 있다.

iii) Maurice Blanchot, “La communauté inavouable”, ed. du Minuit, 1984

방앤리 개인전: 우정은 보편적인 것
2014/03/28 – 201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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