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zerosum Society 넌제로섬 사회 (2012)
2012. 5. 22
NONZEROSUM SOCIETY
BANG & LEE
MAY 22 – JUNE 12, 2012
INSA ART SPACE
OPENING
6 PM, TUE. MAY 22, 2012
넌제로섬 사회
방자영 & 이윤준
2012년 5월 22일(화) – 6월 12일(화)
인사미술공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90, 110-280
02-760-4722
11시 – 19시(월요일 휴관)
www.arkoartcenter.or.kr
Bang & Lee의 “Nonzerosum Society(넌제로섬 사회)”
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 인사미술공간에서 전시
방자영과 이윤준으로 구성된 Bang & Lee는 하나의 개체(individual)이면서 2인조(duo)로 활동하는 그룹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르면서 공존하는 단위(unit)이다.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전시는 귀국 후 처음 개인전 형식을 빌어 기획한 “Nonzerosum Society” 프로젝트의 주요 작업들로 이루어진다. 전시의 제목으로 선택된 주제는 장기간 프로젝트로 진행될 예정이며 이번 전시는 특히 협업(collaboration)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양한 매체들로 구성된 라이트 설치와 컴퓨터 영상이 주를 이루는 전시는 넌제로섬 사회의 특정한 일면을 해석한 여러 설치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유기적인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컨셉으로, 현대사회에서 협업의 정의를 포괄하는 특징을 여러 퍼스펙티브를 가진 요소와 시간 개념을 도입한 네러티브로 구성하고 있다.
넌제로섬 게임이 제로섬 게임의 축 안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관계를 작업으로 재현하는 과정은 평면에서부터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한 부분까지 “variable dimension”에 해당하는 여러 설치 형태를 띤다. 이에 각층별로 인과관계를 반영한 전시 컨셉에서, 허구적 요소(fiction)를 빌어 재구성한 설치는 사건(event)의 시작-중간-끝과 같은 연결고리를 가지면서도 과거-현재-미래가 섞인 비선형적 시간(nonlinear time)에 놓여 있어 관람자로 하여금 비평적 접근이 가능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줄 것이다.
확장된 시네마(expanded cinema)로써 큰 주제 안에 층별로 분리된 설치의 소주제들은 에피소드로 기능한다. 또한, 설치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대화 전개를 작업으로 풀어낸 것이다. 즉, 양 방향 소통에 대한 과정을 담고 있으며, 각자 개념적인 접근 방식을 섞어 놓고 또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협업과 공존, 서로 윈-윈(win-win)하는 방향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작업과정 자체가 넌제로섬 게임의 원리에 따라 진행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여 년간 주로 독일에서 체류하여 국내에서는 거의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소개되지 않은 작업 일부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넌제로섬 사회, 새로운 시네마를 위한 설치 프로젝트
3층(지하, 1층, 2층)으로 나누어진 인사미술공간의 전시장 전체는 넌제로섬 게임의 판을 보여준다. 소설의 이야기가 펼쳐진 공간처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사건을 따라 마치 허구 속 퍼즐을 맞추듯 설치물들을 살펴보면 어떤 가공할만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시간의 겹(layer)을 떼어내어 현재로 가져온 것 같다. 시간 순서를 뛰어넘어 여러 파편을 섞어 놓은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적 사건이 불연속적 사건으로 흡수되어 결말이 시작이 되고 시작이 결말이 될 수 있다.
각 방은 일종의 모듈처럼 존재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들에서 작가 스스로 영감을 얻은 인용구를 비롯해 개별 작업의 제목들이 텍스트로 보인다. 텍스트 자체가 메세지가 되기도 하고 넌제로섬 원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코드를 풀 수 있는 힌트로 작용한다. 설치들은 유리, 돌, 철, 알루미늄과 같은 원재료를 가공한 것에서부터 네온, 광섬유, LED 조명 같은 2차적 생산물이 모터, 스크린, 프로젝터 등과 연결되어 만들어진 혼합매체인데 키네틱 라이트 아트, 멀티스크린 영상 설치, 프로젝션 등이 사운드와 어우러진 디자인 혹은 설계에 가까운 형태를 보여준다.
데이터 비주얼리제이션을 통해 만들어진 모자이크 영상이 “가변적 스크린플레이(variable screenplay)”에서 생성되는 불완전한 대화와 함께 화려하게 메타 데이터, 인덱스의 배열을 보여주는 설치를 제외하면 대부분 라이트 아트 설치로 이루어져 있다. 키네틱 램프들과 네온 조명들은 앤틱, 빈티지 소품이 말끔히 수리(renovation)된 것처럼 보이는데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것 같지만, 상당히 진부한 기술의 산물도 있다. 작가는 오래된 기술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역행하는 기술(reversed technology)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무언가 보여주는 형식이 이미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기능성과 장식성 사이에 서 있는 듯한 램프들, 또 벽에 겨우 붙어 있는 어설프고 낡은 간판처럼 네온 조명이 매달린 상태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빛과 어둠 등 상반된 의미가 중첩되는 상황을 뜻한다.
“우정은 투명하다(Friendship is transparent)”는 메시지를 직접 노출하는 작업은 램프들 사이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전환(image-to-text), 텍스트에서 사운드로 전송(text-to-sound)되는 데이터 트랜스퍼링의 과정을 보여주는 광섬유 라이트 설치는 디지틀 기술을 아날로그 감수성으로 풀어내며 메시지의 “명백한 전달(transparent transfer)”은 이런 것이라고 관람자에게 농담을 건넨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빛과 어둠 같은 이분법적 논리가 회색지대에 놓일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해 철저히 계획된 부분, 즉 연극적인 공간과 영화에서의 공간 사이, 또 소설에서의 시간과 실제의 시간을 섞어 놓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텍스트 덩어리로 구성된 몇몇 설치들은 독백, 대화, 인용, 혹은 자동번역기를 통해 얻은 응답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소통의 불가능성과 한계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동시에 언어 때문에 한정되는 사고와 표현의 폭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언어 때문에 소통이 가능하지만 말이 오해의 근원이 될 때, 해석의 차이가 서로의 입장 차이, 균열, 불평등, 적대적 관계 등을 초래하는 상황을 낳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가 폭로(revelation)나 시위(demonstration), 혹은 선전(publicity)이 아닌 반영(reflection)이라고 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폭로하기 위한 전략을 거부하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얻은 결론을 분석하여 협력, 혹은 협업을 유인하는 관계에서 드러나는 어두운 면을 조명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었다. 신뢰라는 바탕 위에 획득되는 가치인 우정이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주요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라이트 설치물들은 다소 냉소적이면서도 자기 반성적인 의미도 크다. 또 독일에서 활동하던 당시부터 최근까지 발생했던 “어두운 기억들”이 반영된 작업도 일부분 발견할 수 있다.
전시장을 들어서는 관람객은 어느 작업을 먼저 봐도 관계가 없을 것이다. 예전 “FARM” 프로젝트에서는 조지 오웰과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두 유령이 있어 패러디의 확장이라는 코드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Nonzerosum Society” 전시는 메타픽션(metafiction, 픽션을 구축함과 동시에 그 픽션의 구축 방법 자체에 대해 말하는 소설)과 간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원이 다른 공간과 시간을 그물망처럼 엮어 사건의 과거, 현재, 미래가 넘나드는 뒤섞인 시간을 만들어 낸다.
다양한 장르의 레퍼런스들이 조각조각 패치처럼 얽혀 있어 앞으로 세부적인 작업의 전개도 주목할 만하다. 광범위한 주제 때문에 전시 후, 연작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소설의 후속편처럼 지속적인 전개가 이루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접근할 수 있는 여러 통로가 있어 개별적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 범위도 확대되어 있지만 반대로 그만큼 더 해석이 어려울 수도 있다. 따라서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작업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고, 이야기는 사건이 모두 벌어진 후에 완결된다. 관람객은 스스로 참여자이거나 관찰자, 혹은 방관자가 될 수 있다. 그것 역시 규정할 수 없는 선택적인 것이다. 게임이 벌어진 판에 놓인 말이 되어 역할을 하거나, 또 밖에서 구경꾼으로 훈수를 두거나, 아니면 순전히 지켜보는 행위만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모두 게임에 참여하여 퍼즐 맞추기를 시작할 때이다. 우리는 익명의 플레이어가 되어 끼어들기를 할 수 있다.
– 이하 인터뷰, 질문과 답변 Q & A로 정리 –
Q & A
Q. 이번 전시가 넌제로섬 사회의 단면, 혹은 어두운 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 프로젝트 기획 의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A. 설명이 아니라 고백, 혹은 지난 사건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 사소하지 않은 게임이라는 것과 이 게임의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 굳이 게임 이론을 도입해 분석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넌제로섬의 원리가 이런 부분을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전시는 특별히 어떤 어두운 면을 조명하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신뢰하는 관계와 소중한 가치들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쩌면 어두운 면 자체가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현재 소셜 미디어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과 소통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나름 던지고 있다. 베일에 가려진 모습을 서서히 드러낼 준비를 하는 것처럼 전시를 꾸미고 싶었다.
Q. 작업을 통해 협업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A. 최선이고 또 차선이다. 우리는 항상 최선을 – 적어도 최선이라고 믿는 상황을 – 선택한다. 만약 그 어느 누구도 최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옵션이 주어질 때, 우리들 중 대부분은 차선을 택하는 상황으로 사건을 종료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차선이란, 다소 희생이 따르는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이며 우리 모두 공존하는 이유가, 또 그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일종의 암묵적인 동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얻어지는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이 달라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가령 영화 아폴로 13호처럼 지구로 안전히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갑자기 SF 호러 에일리언의 폐쇄형 대형 우주선 노스트로모(Nostromo)호처럼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소셜”의 의미를 확대하는 여러 미디어, 특히 구글과 기타 강력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제공되는 플랫폼에서 일어나는 협업 같은 일들, 또 오픈 소스가 제공되는 사이트 등에서 협력이 이루어지는 행위는 상당히 위험한 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공동 작업자(art partners)로 작업하는 모든 과정, 즉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생산해내기까지의 전개를 살펴보면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얼마나 끈끈한 유대관계와 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인내와 노력만으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친구라는 이유로,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협력을 통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생산적인 협업을 지속해야 하고 공존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정말 복잡한 그물망처럼 관계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협업의 의미를 정의하기가 어렵다. 네트워킹이란 말은 참 설명하기 쉽지 않은 단어이기도 한데 어쨌든 협업을 통해서 네트워킹이 확장된다. 때로 그것 자체가 작업이 될 수 있다.
협업을 통한 작업은 상당한 시너지도 가져오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따르며 리스크도 크다.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다. 언제 풍랑을 만나 좌초할지 모르지만, 그 긴장감과 두려움이 공동 작업에 힘을 실어 주는 것 같다. 이것 역시 대칭적인 긴장관계, 두 힘의 역동적인 비례관계다. 이번 전시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정에 대한 몇몇 에피소드를 늘어놓은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 협업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더 나아가서 넌제로섬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의 일면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Q. 우정에 대한 몇몇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업을 층별로 간단히 소개해 준다면?
A. 전시장을 들어서면 1층에 “The Great Achievement”라는 제목의 영상 설치가 있다. 그 앞에 대리석에 새겨진 묘비처럼 생긴 기념비가 놓여 있다. 또 죽은 친구들이 남기고 간 유언 같은 말들, 즉 이미 모뉴멘탈한, 기념비적 존재가 되어 버린 인용구들이 지키지 못한 약속, 퇴색된 의미를 뒤로하고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 되는 빛, 영혼의 그림자로 남아 있다.
1층에 설치된 작업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표본집단의 언어가 인덱스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쉽게 말하면 우세한 언어, 즉 영어를 통해 라이브러리가 구성되는 상황을 꼬집고 있다. 개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집단지성을 통해 이룬 업적들이 대부분 모노폴리로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때, 노력, 용기, 혹은 기술에 의해 무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과연 진정한 성취인지 반문한다. 또 이것은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기념비들이 있다. 협업이란 이름 아래 눈부신 업적이 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서처럼 우리는 이제 적과 친구를 잘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어제의 적과 우리는 오늘 친구가 되어 서로 협력하는 관계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오늘 친구였지만 내일 적대적인 관계로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관계의 차원을 떠나 협업은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또 우리가 여전히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더불어 집단지성, 소셜 미디어의 혁명적인 면들이 아직 유효하다. 이런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 중 하나가 모자이크가 아닐까 싶다. 하나의 큰 것을 얻기 위해 많은 작은 것들이 모인 시각적 이미지의 집단, 즉 비디오 모자이크 영상으로 은유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개별적 이미지 자체가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앗상블라쥬, 꼴라쥬의 의미도 크다. 또 익명의 집단적 기여(contribution)라는 측면에서 생성된 모자이크 픽셀들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미지를 웹에 올릴수록 더 정교해진다.
넌제로섬 게임을 통해 발생하는 이득, 여기서 누군가 이루는 위대한 성취, 스스로 모뉴멘트를 세워왔던 인류 역사의 장면들을 살펴볼 때, 그 결과 유물처럼 남아있는 기념비는 한때 견고했지만 이미 퇴색된 가치처럼 보인다. 업적과 획득에 대한 반어적인 표현으로 묘비와 기념비 중간 사이의 무언가가 될 수 있는 돌덩어리를 바닥에 던져 놓은 것이다.
지하로 내려가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전)우애”가 형성되는 초기 사건의 전개가 펼쳐져 있다. 램프처럼 보이는 두 설치물 사이에 우정에 대한 의미를 보여주는 광섬유 라이트 설치 작업이 놓여 있다. 광섬유 작업 좌우에 “world leaders”란 단어로 구글 검색 결과에서 수집한 수많은 이미지를 모아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들의 컬렉션으로 재현한 램프와 이미 세상을 떠난 위인들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는 망사가 드리워진 램프가 대비 구조로 설치되어 있다.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업적을 남길 위대한 인물들, 한때 추앙받던 지도자들, 그리고 이미 발자취를 감춰버린, 현실에서는 교감할 수 없는 인물들을 죽은 친구(dead friends)로 규정하고 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유산을 통해 소통 가능한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소통의 한계 설정과 우정의 의미를 다른 맥락에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빛과 어둠은 대립하는 존재로 보이지만 늘 같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속성처럼 우정이 형성되는 과정, 또 협력하고자 하는 약속 같은 발언이 내포하는 의미를 재설정해보면 어둠의 반대는 빛이 아니며, 빛의 반대가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2층에 설치된 작업들은 직접적인 텍스트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어쩌면 협업과 넌제로섬 게임의 법칙에 따르는 어두운 면들은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며, 또 풀어야 하는 숙제처럼 보인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사건을 분석하는 일이다. 우정, 끊임없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가성 없는 투명한 관계, 변함없는 사랑 등 살아가는 데 있어 소중한 가치들은 넌제로섬 원리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가치를 지켜나가는 일이 쉽지 않다.
때로 가치를 부정하고 신뢰를 무너뜨리며 사실을 왜곡하는 일들이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떤 가치가 변질되고 추락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장치들이 작동하는 것을 알게 된다. 쉽게 깨질 것 같은 유리에 새겨진 계명처럼, 이미 발생한 사건이 부정될 때, 역사는 다시 쓰여지고 이때, 개정판(revision history)들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개별적으로 오류를 식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텍스트로 작업한 설치들은 일종의 경고(alarm)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으면 보라색이 된다. 여기에 또 다른 색이 섞이면 점점 다른 색으로 변해 결국 탁해질 것이다. 보랏빛 약속이다. 거짓말, 가짜, 지키지 않는 약속처럼 되어 버린다. 예술작업에서도 혁명적 작업에 표절을 섞으면 그 의미가 변질한다. 협업을 통한 예술 작업의 가치가 변화된 상황도 이와 비슷할 수 있다.
인사미술공간 전시장은 해석하기 쉽지 않은 공간이다. 수수께끼처럼 질문을 던지는 설치들이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재배치되고, 이벤트를 따라 전시장 동선이 달라지는 공간으로 작업이 해석되기를 바란다. 또 그에 따라 물리적인 공간에서 때로 연속적 사건이 비선형적인 이야기 전개로 나타나면 좋을 것 같다.
Q. 미디어 아트라는 정의도 일종의 장르에 국한된 표현에 불과하다. 굳이 뉴미디어라는 영역에 속하는 설치 작업도 아닌 것 같은데?
A.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이라고 생각한다.
Bang & Lee
Bang & Lee는 방자영과 이윤준으로 구성된 작가그룹으로 뉴미디어, 디자인,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설치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진행해 오고 있다.
초기에 퍼포먼스를 동반한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설치를 시작으로 키네틱 라이트, 만질 수 있는 세라믹 악기를 이용한 작업에서 가변적 스크린플레이(variable screenplay)에 의한 데이터 프로세싱과 앗상블라쥬, 최근 비디오 모자이크 영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혼합 매체를 다루고 있다. 다양한 레퍼런스와 함께 픽션의 속성을 빌어 협업과 우정이라는 주제를 해석하고 네트워킹과 소셜 미디어의 확장에 따른 개념을 반영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영화와 연극 사이의 공간에 있는 설치의 형식은 가변적 성격을 띤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인터랙션의 의미를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함으로써 가상 세계로 확대하는 방식을 취한다. Bang & Lee의 공동 작업과 다른 작가들과의 협업 프로젝트는 칼스루헤 ZKM 미디어 아트센터(독일), 세비야 비엔날레(스페인), 백남준 아트센터(한국) 등에서 전시되었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