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코끼리” 타임라인

Year 2009
Elephant in the room

방안의 코끼리, 삼라만상
– 집단적 앗상블라주와 가변적 발언

모든 것은 오늘날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FARM”의 무대 가운데 자리한 나무 상자(예술품을 운송하기 위한 크레이트)는 집단적 앗상블라주의 형태로써 가변적 발언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코끼리의 “상(image)”은 상자 가운데 투영(projection)되어 있는데 이것은 실제 작은 코끼리 조각의 그림자가 맺힌 곳을 조명(highlight)한다.

이미지에 대한 환영, 그리고 삼라만상(森羅萬象). 삼라만상은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뜻한다. 수풀 삼(森), 그물 라(羅), 일만 만(萬), 코끼리 상(象)으로 이루어진 문자에서 우리는 코끼리 상(象)의 어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코끼리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 때 코끼리의 뼈를 구해 살아있는 모습을 상상(想像)한 것은 결국 여러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이미지(象)로 떠올린 것이다. 본질을 알아가는 첫 단계, 명백한 진실과 지혜를 향해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거울 속 영상이나 물에 비친 그림자(reflection), 빛의 굴절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을 살펴보았다.

논쟁적인 이슈나 문제점에 대한 질문과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무시되는 상황을 나타내는 “방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라는 이디엄은 “장님과 코끼리”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다. 방안의 사람들이 코끼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은 어떤 문제에 대한 집단 부정(collective denial)을 내포한다. 정보의 시대에 우리는 방대하고도 다양한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본질적인 맥락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 방안의 변화하는 이미지들과 그런 이미지의 대상 자체인 코끼리는 은유(metaphor)로 사용되어 일종의 서투른 재담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또한 웹2.0시대에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이미지의 의미를 반영하는 독특한 성격(specular idiosyncrasy)을 대변하기도 한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나 실체가 너무 크거나 복잡해서 파악하기 불가능하므로 거기 코끼리가 없다고 믿는 것. 혹은 그런 척하는 것. 가변설치에서 크레이트 안에 담긴 모든 장치는 이런 문제점을 정면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탑처럼 세워져 있다. 상자에 마운트 된 스크린에서 인덱스 알고리듬을 통해 제너레이팅 되는 모자이크 영상들은 상상으로만 가능한 이미지들을 꿰맞춘다(patch). 경계를 알 수 없는 합집합(U) 속에 이미지들은 실시간 생성되지만, 곧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되어 즉시 소멸한다. 늘 변화하는 이미지는 매력적이지만 이 이미지들의 원본은 어디에서 왔으며 결국 코끼리의 무덤에서 영원히 잠들지는 의문이다.

– 작가 노트

Year 2012
FriendƧ in the living room

George Orwell(조지 오웰)의 Animal Farm(동물 농장)에 등장하는 “freind(프린드)” 개념을 바탕으로 전개된 설치는 동시대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친구와 우정, 협업과 공존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소설 속에서 동물들이 인간의 언어를 배울 때, 영어의 “friend”를 i와 e의 자리가 바뀌게 쓰고 7계명 중 어떤 S 하나를 거꾸로 뒤집어쓰면서 철자 오류를 범하는 에피소드에 근거하여 복잡한 관계망과 미디어의 영향 아래 변화하는 우정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모자이크 제너레이팅 영상과 연결된 “Can’t Take My Eyes Off You” 광섬유 작업과 “You We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키네틱 라이트 설치로 이루어진 무대에서 각각의 오브젝트는 텍스트와 사운드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래된 팝송인 “You are my sunshine”과 “Can’t take my eyes off you”는 유튜브의 사용자들이 올린 여러 샘플들이 리믹스 되어 실시간 재생되고, 이 사운드와 연동된 라이트는 공간을 채운다. 여기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중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빛과 어둠이 대변하는 것의 양면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환기시킨다. DIY 재료들과 함께 변형된 장식품과 산업화 된 사회가 낳은 대량생산품은 예술작품이 되고 건축과 디자인의 경계 사이에서 또 다른 설치로 거듭난다.

친구들이 있는 거실이라는 공간은 일종의 딜레마를 내포하며 사적인 관계의 차원을 벗어나 소셜 미디어와 개인, 거대 기업과 클라이언트, 혹은 네트워크와 사용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떠올리는 공간을 재현하고 있다. 허구적 상황과 실제(사실의 경우)가 겹치는 장소로서의 ‘거실’은 안락함과 프라이버시를 의미하는 공간을 전복시킨다. 사적 영역이 공공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폐쇄적인 한편 네트워크로 침투 가능한 전략적으로 열린 건축적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익명의 관람자들은 ‘친구’의 이름으로 등장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참여자가 되어 설치 공간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즉, 거실에 있는 친구들의 모습은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타자의 시각을 통해 스스로 끊임없이 지켜보고 평가해야 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 전시를 위한 설명

Year 2013
Elephant in the living room

I. 프롤로그

“거실(living room)”은 우리 각자가 가진 라이브러리의 레퍼런스 카드로 지난 몇 년간 여러 관점에서 발전시켜온 주제이다. 매일 사용하는 집안의 공간으로 정의되는 거실은 이미지의 장소, 행위의 무대, 반전의 공간이며, 동시에 영화와 연극의 공간, 삶이라는 무대, 그리고 미디어라는 거울이 비추는 곳이다.

수많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잊어버리는 장소.

사적인 공간인 거실, 소파 위 반쯤 기대거나 드러누운 상태.

TV와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통해 지나가는 순간의 정보들, 이야기, 이미지와 사운드.

지금 여기 토론을 위한 공간이 있다.

전시 공간으로 들어온 사이비(pseudo) 거실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행위는 토론이지만 그냥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고 또 들어도 족할 것이다. 모든 방문자가 나름의 스토리텔링을 전개하고 그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면! 그래서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면! 거실처럼 꾸민 토론을 위한 공간은 이렇게 변형된다.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희극적 상황을 연출하기를 기대해 본다.

어디에나 이 (사장님) 소파를 가져다 놓을 수 없으므로 –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 우리 모두의 그럴싸한 거실 안에 이미 놓여 있는 것을 상징하는 소파 두 개를 전시 공간에 던져둠으로써 인터랙션이 가능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한다. 전시를 보다가 잠시 쉬어가도 좋을 그런 공간 – 나의 쉼터, 그리고 여러분의 무대.

II. 토론의 공간으로써 거실

토론은 상호 소통적인 논증과 논의 방식이며 행위다. 토론을 위한 방은 우리 사이에 필요한 토론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이지만 이곳에서 – 2인 컬렉티브의 프레임에서 – 토론의 주제가 될 질문의 쟁점은 협업과 공존, 우정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이며, 또 어떻게든 앞으로 지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마치 토론을 위한 방(debate room)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처럼, 우리는 대화를 위한 공간에서 토론에 대해 말하고 우정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굳이 거실의 공간을 재현하고자 한다.

역사적인 훌륭한 토론에서 도출된 것은 무엇일까. 상대방은 이미 나의 친구이거나 적이겠지만 동시에 둘 다 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서로 모호한 위치에 앉은 사람들은 대칭적 역학 관계에서 소통, 연대, 그리고 더 모호해지고 확장된 의미에서 “우정”이란 이름으로 공존해야 하는 사회에 속해 있다. 익명의 집단 기여를 통해 쓰인 위키백과에 기술된 우정의 정의(2012년 5월 25일 갱신된 옥스퍼드 사전에 근거)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우정(友情)은 두 명 이상의 사람 사이의 협동 관계를 말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넌제로섬(non-zero-sum)을 향해 전개되어 온 인류 역사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협력과 공존, 우정의 가치를 역설(emphasize)하지만 아직도 이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할 가치가 남아 있다. 무언가 우세하고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토론의 과정을 통해 얻는 깊은 사고와 토론 후에 발생하는 방향성에 주목해야 한다. 작업을 통해 대화할 수 있다면 – 그리고 거의 예술적 가치에 근접한 윤리적인 삶은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면 – 토론의 과정 자체는 가치 있는 삶의 규율(discipline)이 되어 법적, 사회적, 문화적 관습의 제약을 포용할 수 있다.

III. 친구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실수를 저지르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은 협동정신의 가치와 이타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예술 프로덕션에서 윈윈(win-win) 전략은 협업과 공동 프로덕션(joint production)의 형태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이 확대될 뿐이다. 또 정신적인 부분이 공동 작업의 질서를 관장한다. 어떤 가치 기준이나 목적이 타당해야 함은 물론, 둘 사이에는 일종의 화학적 작용(chemistry)이 요구된다. 협업자 간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낫다는 것을 동시에 긍정한다면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어도 그 우정은 지속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거기에 물리적인 요소, 즉 시간과 경험이 더해지면 이 화학적인 작용의 심도는 깊어지며 시간의 겹은 압축되어 밀도가 커진다. 우리는 과연 실수하는 것을 계속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것일까.

IV. 거실의 (소셜) 미디어

주변의 TV를 비롯한 인터넷 등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되는 상호적이지만 상당히 경쟁적인 토론의 단면들, 즉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결국 정리되지 못하는 내용 자체는 거실에서 일어나는 가늠할 수 없는 현상들과 같다. 따라서 거실의 코끼리(삼라만상에서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파편들)는 우리가 종종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무시해 온 문제들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는 첫 단계 그림이다.

누구라도 소파 위에 앉으면 미디어에 노출된 (다소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퍼블릭 토론에서 드러나는 형식을 관조하는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참여의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단지 관찰자로서의 관람자는 토론을 소비하는 입장에서 자주 소외되는 핵심을 원격 파악한다. 그러나 스스로 토론의 참여자 자리에 위치함으로써 거실이 아닌 극적 세트 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관객은 대표자 자격으로 토론이나 대화에 참여하는 인물이거나 아니기도 하다. 동시에 관객은 타자뿐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관찰한다. 자신 스스로 누군가의 타자가 되었을 때나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볼 때, “내가 아는 것을 당신이 안다는 것을 나도 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우리는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하게 된다. 자신을 마주하며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다시 보는 상황은 애초부터 타인이 나를 본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헛된(vain)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런 의식은 끝없이 펼쳐지며 무한히 반복되는 어떤 목적성 없는 방향,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단일 경계의 연속성처럼 – 마치 뫼비우스 띠같이 – 영원히 쳇바퀴를 도는 듯한, 달리 말하면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토론의 여지가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어쩌면 너무 쉽게 방관자의 입장이 되어 스스로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그 때문에 대화나 토론이 표면적으로만 이루어져 논점이 흐려지게 된다. 결국, 의사소통은 더욱 어려워진다.

일반적으로 쉽게 공유되지 않는 개인의 사고나 경험이 있다. 개인적 삶의 세세한 부분이 사회적 경험으로 확대될 때 의사소통의 수단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는 토론의 장이 펼쳐진다. 타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과정에서, 혹은 적어도 거실의 모니터에서 전달하는 이미지들을 볼 때, 우리는 사적 공간에서 바깥세상의 일부를 탐색할 수 있다. 아마 사람들은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모든 거실 한편에서 (TV뿐 아니라) 태블릿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찾고자 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거실에 대한 성격을 끊임없이 재조명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이중성의 공간을 재현하는 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이중성을 표현하는 설치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양면성을 가장 잘, 그것도 모순된 개념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V. 거실에서의 담화를 위한 세트, 개인적인 대화에서부터 정치적인 토론까지

– 5개 영화의 몽타주, 선택된 시퀀스는 스토리텔링 재구성을 위해 유투브에서 발췌

어쩌면 거실은 대화가 결핍된 공간을 상징할 수도 있다. 거실 시리즈 프로젝트에서 허구적인 요소는 부분적으로 자기반성적인 태도와 비평적인 관점이 섞여 있다. 모조품 가구(imitation), 살림, 집기, 조명과 TV 모니터로 꾸며진 설치에서 토론의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소품들은 변형되어 재구성된다. 대중문화 속에 자리한 역사적 토론의 부분 리서치에서, 아래 시퀀스는 매혹적인 연설과 영화적 담화(cinematic conversation)를 들려주는 장면들로 선택된 것이다. 개인과 커뮤니티의 가치가 공유되는 지점들을 연결한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스토리텔링은 코끼리 이미지 전체를 차지한다.

시퀀스 1.

션 맥과이어가 윌 헌팅에게 진정한 친구에 관해 질문하는 장면 (1997)
태그: 개인적 대화, 소울 메이트, 죽은 친구들, 의사-환자 관계

시퀀스 2.

찰리 로즈 쇼 데이빗 포스터 월래스 인터뷰 (1997)
태그: 지적 담화, 포스트 모던 문학

시퀀스 3.

촘스키 vs. 푸코 (1971)
태그: 철학적 토론, 정의 vs. 권력

시퀀스 4.

제임스 볼드윈 vs. 윌리엄 F. 버클리 (1965)
태그: 연설, 인권, 역사, 교육

시퀀스 5.

케네디 vs. 닉슨 (1960)
태그: 대통령 후보 토론, 아이디어, 정책, 국가, 미국에서 최초로 방송된 TV 토론

여기까지 디폴트 세팅인데 (아직 가장 중요한 요소는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그다음은 관람객의 참여로 장면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시퀀스에는 우리의 토론이 이어질 것이다.

– 전시를 위해 임의로 편집된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