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비평문] 파편화된 시퀀스의 재구성을 통해 질문하기

Scene#1. 프롤로그

예상했던 일이다. 쉽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원고 마감일에 맞춰 원고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마감일은 이틀 지났고,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일요일 아침부터 텅 빈 사무실에 나와 컴퓨터를 켰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깜빡깜빡 글감을 달라고 재촉하는 커서만 두 시간째 바라보고 있다. 

오늘도 허탕을 칠 수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메일과 문서, 카톡 메시지, 작품 영상 파일 등 일단 방앤리에게 받은 자료가 들어있는 폴더를 열었다. 작가와 나눈 대화나 자료, 이전에 봤던 전시를 복기하다 보면 글을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 시작은 했지만, 별반 소용이 없다. 작품을 보고 설명을 읽다가 보면 어느새 작가가 던져 놓은 주제에 빠져들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뇌신경, 뉴런, 미래의 어느 날,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로봇에게 윤리를 강요할 수 있을까 등등.

자꾸만 딴 곳으로 빠져나가는 생각을 붙잡아 오기를 여러 차례. 그런데 왠지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다. 처음 방앤리라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을 때, 나는 꽤 오래 비슷한 상황에 붙잡혀 있었다.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들이 던진 질문과 주제에 대해 딴생각하다가 글을 시작하지 못해 꽤 애를 먹었었다. 방앤리의 작품은 늘 그랬다. 작품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어느덧 이야기는 예술과 기술, 정치, 사회 그리고 윤리 등등 인간을 둘러싼 방대한 이야기로 무한 확장되고 퍼져간다. 그들의 작품은 그저 ‘보기’만 하는 작품이 아니라 자꾸만 생각을 종용하고 ‘읽기’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다시 ‘읽기’로 돌아가야 한다.

Scene#2. 지연되는 완결

예전에 썼던 방앤리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1이 방앤리의 새로운 작품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글을 찾아 다시 읽었다. 글의 시작은 이랬다. “어떤 오해-방앤리의 작업은 어렵고 불친절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때도 그랬구나 싶었다. 급변하는 현대(기술)사회의 모습을 비평적으로 바라보고, 동화에서 TV 드라마까지, 시와 소설, 영화 등의 다양한 문학적 레퍼런스까지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종종 어렵고, 불친절하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작가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생각하고 정리하여 만든 작품을 한눈에 파악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이고, 자료를 찾아보고, 차근히 설명을 읽어보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조금 어려운 작품들을 좋아한다. 단번에 다 읽히는 그런 작품 말고, 내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아마도 이러한 성향 때문에, 방앤리의 작품은 어렵다고 투덜대면서도 방앤리의 작품이 늘 흥미롭고, 그들의 신작에 늘 관심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방앤리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한 그 글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한 후 방앤리라는 작가의 태도로 마무리한다. 만일 현대사회에서 예술, 특히 ‘미디어아트’라고 하는 것은 화려한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세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여 질문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방앤리는 바로 그런 질문을 잘하는 예술가/미디어 아티스트라고 했다.  

〈Revision History X〉, 〈Friendship is Universal〉, 〈Elephant in the living room〉, 〈Lost in Translation〉 등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보더라도 방앤리는 당시 변화되는 (기술)사회의 본질적인 부분에서 적절하게 질문을 해왔다. 하지만, 방앤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질문을 잘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주제와 관심을 늘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데 있다. 모든 작품은 각기 다른 형식으로 구현되고, 차별화되지만 전체 큰 주제적 맥락에서 연결되면서 방앤리만의 서사 구조를 암시해 간다.

특히 〈Transparent Study〉는 하나의 주제 안에 다양한 오브제들로 인벤토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결합-해체-재결합의 형식으로 변화되는 방앤리의 작업방식을 잘 보여준다. 〈Transparent Study〉라는 단일 작품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인 〈#Transparent Study〉2는 〈Transparent Study〉를 구성하는 총 25개의 오브제를 목록화하고, 이 작품이 전시되었던 전시 히스토리, 그리고 작품 구상도, 아이디어스케치, 작품을 제작하는 데 참고했던 다양한 문헌 리스트 등을 웹사이트로 구축하여, 한 작품의 구성요소를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이 전시 때마다 어떻게 다양하게 변주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방앤리의 작품을 개별 작품으로 이해하기보다 매번 변화가능한 ‘프로젝트’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키네틱 라이트, 센서 기반의 악기에 이어 최근에는 AI 기반 생성형 프로그램까지 아우르면서 장소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며, 해체와 재구성, 확장이 가능한 일종의 ‘프랙탈’ 구조와 닮았다는 점에서 방앤리는 다른 미디어 아티스트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방앤리의 작품은 ‘완결을 미루면서 완성되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늘 과정 중에 있는 프로젝트,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 끊임없는 변주, 그래서 방앤리의 작품은 늘 진행형이다. 방앤리의 작가론에서 나는 진행 중인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는 그들은 어쩌면 ‘예술가 되기’를 연습하고 있는 예술가인지도 모르겠다고 썼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서슴없고, 변화되는 세상의 껍데기가 아닌 본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기에 만날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있는 작가, 그렇게 ‘예술가 되기’를 하는 작가가 당시 내가 만난 방앤리였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완결되지 않은 과정형의 프로젝트를 정리하겠다고 덤볐으니, 진전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진행형’의 예술가, ‘예술가 되기’의 시도가 출발이어야 했다.

(나에게)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는 달리는 렌터카에서 시작되었다.

Scene#3. 달리는 렌터카와 ‘두 개의 빛’

방앤리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가는 AI 예언자(오라클)를 만난 곳은 〈아이샤인〉3에서였다. 마치 누군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전시장에) 놓여 있는 빈 의자에 앉아 AI 에이전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예언자가 본 ‘금빛 구슬 같았던 두 개의 빛’,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던 흰 꼬리 사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아마도 자율주행으로 운행하던 시스템(AI 예언자)이 갑자기 튀어나온 흰 꼬리 사슴으로 인해 오작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어떤 사고가 발생한 것 같다. 이야기 도중에 가끔 처음 듣는 기술적 용어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자율주행과 그와 연관된 윤리적 문제들과 복잡하게 닿아 있는 AI 예언자의 딜레마에 관객으로서 나는 어떤 입장을 정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워 자신에게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자율주행은 AI 기술과 모빌리티 기술의 발전이 연결되면서 일상의 변화를 촉구하는 첨단 기술임에는 분명하다. 어린 시절 공상과학소설이나 SF 영화에서 보던 운전자 없이 주행하는 자동차는 이미 실현되어 몇몇 도시에서 시범 운행 중이다. 기술적으로 실현되었지만, 그 기술로 인해 새롭게 변화된 사회 안에서 제기되는 이슈들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그중 필리파 풋이 제시하고 주디스 자비스 톰슨 및 이후의 피터 엉거와 프란세스 캄이 체계적으로 분석한 ‘트롤리 딜레마’라는 사고실험은 인공지능이나 자율주행 기술이 시행되면서 본격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는가 하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트롤리 전차가 철길 위에서 일하고 있는 다섯 명의 인부들을 향해 돌진한다. 만일 당신이 트롤리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꿀 수 있는 레일 변환기 옆에 서 있고, 당신이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꾸면 오른쪽 철도에서 일하는 한 명의 노동자만 죽게 된다면 어떤 선택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다섯 명의 목숨이 반드시 한 명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다섯 명을 위해서 한 명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어렵다. 자율주행차로 상황을 바꾸어 보자. 만일 직진하게 되면 다섯 명의 보행자를 치게 되고, 방향을 돌리면 한 명을 친다면, 직진하는 경우 한 명의 보행자가 죽게 되고, 방향을 돌리면 운전자 혹은 탑승자인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결단을 내리도록 프로그램되어야 할까? 자율주행차는 어떤 상황이던 결정을 내리도록 프로그램되어야 하는데, 자율주행차는 과연 ‘트롤리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이샤인〉에서 AI 예언자와 AI 에이전트와의 대화가 이러한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는 내내 관객은 이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아이샤인〉은 3D 모델링과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된 10여 분 남짓의 2채널 영상이다. 교통사고에 대한 이야기지만, 중년쯤 되어 보이는 남성 AI 예언자와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AI 에이전트와의 대화를 통해서만 사고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스펙터클한 효과나 장면도 별로 없다. 등장인물이 한국어로 말하기 때문에 현재 소프트웨어로서는 대사와 입 모양을 맞추기가 어려웠다는 여담을 제외한다면, 언리얼 엔진과 마야를 활용하여 만든 이 영상에는 그 어떤 스펙타클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차분한 두 사람의 대화로 이어지는 영상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묘하게 흡입력이 있어 계속 집중하게 하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방앤리는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인간의 뇌 구조와 동작 원리를 모사하는 반도체를 설계하는 분야로 알려진 뉴로모픽(Neuromorphic) 공학 전문가인 박종길 박사와 만나 많은 대화(수다)를 나누었다고 했다. 뉴로모픽 공학과 차세대 반도체 기술에서 인공지능으로, 챗GPT에서 창작자의 고민으로, 인공생명에서 과학기술 윤리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나누었던 그들의 대화는 〈아이샤인〉에서 AI 예언자와 AI 에이전트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관객은 AI 예언자와 AI 에이전트의 대화에 빠져들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샤인〉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AI 예언자와 AI 에이전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전에 보았던 방앤리의 다른 단편 영상들이 이미지로 떠올라서 하나의 영상작품을 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뭔가 긴 영화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I 예언자가 차를 타고 달리는 부분에서는 2022년 3D 애니메이션 작품 〈The Prairie Giant〉4의 사막 풍경과 창고 이미지가 떠올랐고, 사고가 나는 지점에서는 30초 남짓의 〈The Grain Elevator〉5가 생각나면서, 마치 AI 예언자의 차를 타고 긴 여행을 함께 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구성과 느낌은 〈Transparent Study〉를 구성하는 다양한 오브젝트/아이템들이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던 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나의 영상 작품을 보는 가운데, 이전 영상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소환되고, 새로운 문맥에서 재맥락화되는 방식은 언뜻 방앤리의 작품이 이전과는 달라진 듯 보이지만, 방앤리 고유의 작품 제작방식과 관객과의 소통방식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Scene#4. 스파이킹 신경망6

방앤리는 작가 노트에서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고 그것의 숨은 의도나 가치를 찾아내는 것 이상의 질문들이 전시장에서 공명하길 바란다. 깨어있는 관객의 참여가 비평적 행위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비평적 행위까지 이끌어내기 위해서 전시는 어때야 하는가. 그리고 작품은 또 어떤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가. 박종길 박사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의 단초를 엿볼 수 있었다.

국내 몇 안 되는 뉴로모픽 공학 전문가인 박종길 박사는 뉴로모픽 공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의 뇌는 시각 정보를 받아들일 때, 카메라가 사진을 촬영하듯 한 장의 사진을 연속적으로 촬영해서 이미지 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 지점의 시공간적 정보의 변화를 감지하였을 때만 시각세포에 스파이크를 발현하고 스파이크 시신경을 통해 뇌에서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영역으로 전달하여 시각 정보를 인지한다. 다른 감각 정보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렇게 희소성(Sparsity)을 가지는 정보를 가지고도 연산의 효율이 매우 높고 고차원적인 인지, 판단 능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뇌이다. 이러한 연산의 형태를 가깝게 모사하고자 하는 것이 뉴로모픽 공학이고 이를 실제로 하드웨어로 구현하는 것이 뉴로모픽 반도체 설계 분야이다.”7

박종길 박사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방앤리의 작업이 작동하는 방식이 마치 시공간적으로 연속적인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스파이크 신호로 전달되는 스파이킹 신경망(SNN)의 방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Transparent Study〉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3D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하는 최근 작업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영상은 짧게는 30초 길게는 20여 분까지 이어지지만, 각각의 작품들은 전체 이야기의 파편과 같다. 파편과 파편이 하나의 분명한 이야기 혹은 줄거리를 향해서 모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정답이 있는 그림 맞추기 퍼즐이 아니다. 파편과 파편이 만나서 ‘스파이크’가 일어날 때 의미가 발생한다. 의미 역시 유동적이다. 정해져 있는 답이나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파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서 ‘파편’은 완성된 영상작품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전시 공간에 들어오는 시, 그림, 영상 심지어 전시 공간에 놓인 소품은 물론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까지도 파편에 포함될 수 있다. 작품을 만나는 관객이 가지고 있는 배경과 환경에 따라서 파편들이 만들어 내는 스파이크는 예상치 못한 경로로 튀어갈 수 있다. 마치 우리 뇌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방식으로 전시에 접근한다면, 기존의 전시를 만드는 방식을 새롭게 전환해야 한다. 작품을 선정하는 방식, 전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방식은 어쩌면 더 연극적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별 작품이 일종의 유의미한 데이터 혹은 파편이라고 한다면, 서로 다른 파편들이 만나서 스파이크를 만들기 위해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시에 있어 ‘빈 공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Scene#5. 청문회

〈아이샤인〉에서 AI 에이전트는 AI 예언자에게 곧 청문회가 소집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둠 속의 예언자〉에서 AI 예언자의 청문회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줄거리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어둠 속의 예언자〉는 〈아이샤인〉과 연속선상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전시에서 〈아이샤인〉을 함께 전시하기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이샤인〉을 보지 않으면 〈어둠 속의 예언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각 독립된 작품인 동시에 연결된 작품이기 때문에, (방앤리의 작품들이 그렇듯) 이들은 따로 또 같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둠 속의 예언자〉는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이나 확장성, 미래 예측에 대해서 질문하는 동시에 AI의 윤리 문제나 에이블리즘(ableism, 비장애인 중심주의), 접근성 향상 버전,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뇌신경 차이로 발생하는 다름을 다양성으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인식) 등 다양한 주제와 닿아 있다. 청문회장을 연상케 하는 전시장 구성은 관객이 앞서 언급했던 AI의 윤리적 딜레마, 기술의 발전과 변화하는 사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혹은 추궁한다).

하지만 이것은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지금’에 대한 질문이다. 따라서 청문회에 소환된 것은 AI 예언자뿐이 아니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 자신도, 전시를 만드는 큐레이터, 전시를 방문한 관람객도 청문회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에필로그

방앤리는 이번 전시를 만드는 데 있어 접근성 전문가인 서수연 음성해설 작가와 함께 전시 동선 전체를 고민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상의 해설을 덧붙이는 등의 작지만 세심한 배려를 통해서 작가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미술 현장의 구조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뉴런과 뉴런 사이의 스파이크를 통해 인지 활동이 이루어지듯. 작품과 전시, 예술과 과학, 기술과 사회, 기술과 윤리, 장애와 비장애 등의 다양하고 상이한 영역과 주제를 넘나드는 작품 속 세부 아이템들의 충돌과 연결로 이어지는 메시지를 어떻게 인식하게 되고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라 할 수 있다.


  1.  신보슬, 「[방앤리] 해리, 예술가 되기를 연습하다」, 『브릴리언트 크리틱』, 2018. 신보슬 블로그에서 원문 확인 가능. https://brunch.co.kr/@nathalieshin/2
  2.  http://hashtagtransparentstudy.net/bang-lee/
  3. 방앤리x박종길, 〈아이샤인 Eyeshine〉, 2023, 2채널 3D 애니메이션, 4채널 사운드, 조명 스탠드, 3D 프린팅 도자기, 티 테이블, 앤틱 의자, 카페트, 11분 54초. 《내추럴 레플리카 Natural Replica》(김희수 아트센터, 2023) 출품작.
  4. https://www.youtube.com/watch?v=vekUs5edCH4
  5. https://www.youtube.com/watch?v=txsSmQ0SbGQ
  6. 스파이킹 신경망(Spiking Neural Networks, SNN)은 생명의 신경계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모델로서 신경과학 연구에 많이 활용된다. SNN은 뉴런과 뉴런 사이의 상호작용을 뜻하는 스파이크의 시퀀스를 통해 소통하는 신경망을 지칭하는 것으로 최근 많이 연구되고 있는 딥러닝 가속기 기반의 반도체와는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7. 신윤오, 「[AI 반도체 2탄] 박종길 KIST 박사 “인간 뇌 모사에 뛰어난 뉴로모픽 반도체, 이제는 제품화 고민해야”」, elec4, 2020.04.06, https://www.elec4.co.kr/article/articleView.asp?idx=25399

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큐레이터
신보슬은 이화여대 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를 마쳤으며 현재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부터 전시기획을 시작하여, 아트센터 나비(2000~2002),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시티서울 팀(2003~2005)에서 전시팀장으로 일하면서 미디어아트 전문큐레이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2007년부터 현재까지 토탈 미술관의 책임큐레이터로 재직하며 다양한 전시 및 프로젝트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해외 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댄 퍼잡스키, 다니엘 가르시아 안두하르, 안토니 문타다스, 게리 힐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개인전을 기획하였고, 해외 기관들과의 협업을 바탕으로 다양한 국제 전시도 기획하였다. 베르겐 어셈블리 2019의 한국에디션인 《사실, 망자는 죽지 않았다》 전시는 2022년 박물관 미술관의 날 우수 기획전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로드쇼》, 《쇼 머스트 고우 온》, 《세마리 개구리 식당》와 같이 예술과 여행, 요리를 아우르는 프로젝트와 2019년부터 제페토, 스페이셜, 마인크래프트 등의 메타버스 플랫폼을 활용한 프로젝트도 진행중에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슬럼지역 여성들의 자립기반 마련을 돕는 《바틱스토리》 프로젝트를 통해서 예술의 사회적 기여, ESG 활동을 실천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