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운동–사진

김해주
독립 큐레이터

희곡 위비왕으로 잘 알려진 19세기 말의 작가 알프레드 자리(1873-1907)의 마지막 작품은 쉬르말 (1902)이다. 이 소설에서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페달을 돌릴 수 있는 자전거에 타고 열차를 상대로 일 천 마일 경주를 벌인다. 이들은 모두 영구–운동–음식(perpetual–motion–food)’을 공급받아 마치 기계가 된 것처럼 끊임없이 페달을 돌린다. ‘기계–몸’의 사이클리스트들은  죽어가는 동안에도 페달을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을 쓴 알프레드 자리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형이상학인 메타피직스(metaphysics)를 패러디한 파타피직스는 수수께끼 같은 의사 과학을 뜻한다. 형이상 밖의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과학으로, 상상의 공간과 상상의 기술에 대해 묘사하며 상상적 해결책으로서의 과학을 제안한다. 한 마디로 ‘비이성적’인 과학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하는 작업의 방식과 실험들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방앤리의 신작 의 계획과 드로잉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알프레드 자리의 이 소설이 떠올랐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 가지 모티브가 이 작업과 연결되면서 머릿 속의 자전거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는 세 개의 스크린과 카메라, 모니터 등으로 구성된 복합적이고 거대한 설치 작업이다. 작품은 전시장의 일부를 원형으로 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다가갈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관객이 작업 안에서 작품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무대는 모니터, 조명 등의 장치 등을 통해 지정되고 그 안에 서로 마주보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영원히 지연되는 피드백 영상을 만들게 된다.

작품의 제목인 는 원형의 무대 또는 경기장을 의미한다. 공연장으로서의 무대(scene)나 극장이 아닌 고대 원형 경기장의 의미에 가까운 아레나를 제목으로 사용한것은 치열한 세계의 축소판으로서의 장소적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이 스스로를 무대에 선 배우이자 경기장에 놓여진 존재인 이중의 상태로 놓여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아레나의 기본적인 형태와 이로 인해 연상되는 과열된 에너지는 영구적인 회전 상태이라는 작업 전반의 운동성과 연결된다. 한편 아레나의 벽면과 바닥의 기반이 되는 형태인 삼각형 역시 반복성을 보여준다. 자연계에서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동일하게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 사이의 패턴의 유사성과 순환성을 드러내는 이 프랙탈 구조 역시 작업 전체를 감도는 생각과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한 두 작가의 노트에는 ‘바퀴달린 혁명’에 대한 글이 등장한다. 혁명(Revolution)의 어원이 ‘회전하다’, ‘굴리다’를 뜻하는 라틴어에 ‘다시’라는 접두사가 더해져 ‘한 바퀴 굴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더한다.  “역사의 기관차, 혁명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바퀴는 정교한 장치로 맞물려 있고 무수한 톱니(gear)들과 서로 엮여 있다. 발전기(generator)와 전동기(motor)는 속도를 내면서 바퀴를 굴린다. 어느 순간 계속 회전하며 전진하는 힘은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지만 노선이 변경되기 전까지 이 속도와 굴레 안에서 정지하지 못한다.” 거대한 혁명은 세상을 선형적으로 전진하게 이끄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의 노선 안에서 회전 한다는 것이다. 는 이처럼 전진하지만 끝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마찰만을 축적하는 세계 내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인간의 모습을 구조화한 미니어쳐이다.

과거 알프레드 자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구적인 움직임과 회전은 20세기의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공회전과 과부하로 인한 폭발의 예감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것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시대에 우리가 서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커지는 요즈음이다. 절망과 기대가 교차하는  2016년의 서울은 역사의 비극이 마치 프랙탈처럼, 또는 회전하는 운동처럼 짧은 주기와 긴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한 루프의 세계인 이 에서  화려한 조명이나 영구적 회전으로 만들어진 관객들의  이미지는 축적되는 동시에 사라진다. 카메라와 TV 앞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현실에 대한 자각을 이루고, 또  탈출을 꿈꿀 수 있을까? 우리는 이 겨울 하나의 궤도 안에 움직이는 혁명의 트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은 이 트랙 위에 놓인 동체는 스스로 폭파되어 버릴까?

출처: 《산책자의 시선(경기도미술관, 2016)》, 전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