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tions of Enlightening Period.
Translations of Enlightening Period.ABOUT ARTIST
Bang & Lee는 방자영과 이윤준으로 구성된 2인 컬렉티브이다. 뉴미디어, 디자인, 리서치를 바탕으로 전개되어 온 이들의 설치 프로젝트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키네틱 라이트, 센서 기반 악기 등이 등장하는 실험적인 무대와 닮았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형되는 설치는 가변적이며 작품의 재배치에 따라 또 다른 면으로 확장되면서 일종의 프랙털 구조를 만든다. 대부분 부조리한 상황이나 모순과 관련된 프로젝트의 주제는 역사적 자료와 허구적 속성을 통합하여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관계, 우정과 협업의 개념을 재해석한 내용으로 반영된다.
이들의 설치에서 텍스트와 원형(original form)에 관한 지시적인 비주얼은 주요하다. 작품의 재료와 기술적인 특이성, 물질의 속성과 매체의 성격을 해석한 과정에서 원형(circular) 구조 안에 각각 분리된 대상은 어떤 이야기의 틀로 느슨하게 환원된다. 가변적인 스크린플레이(variable screenplay)나 실시간 생성 모자이크 비디오(generative video mosaic) 영상과 같이 데이터 프로세싱과 디지털 아상블라주가 연동된 설치는 무대 공간의 거리와 관점을 바꾸는 퍼포먼스 요소를 갖추고 있다.
Bang & Lee의 작업은 독일 카를스루에 ZKM, 스페인 세비야 비엔날레, 영국 브리스틀 워터쉐드, 이탈리아 로마 21세기 국립현대미술관, 중국 상해 현대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 인사미술공간, 미디어시티서울, 대구사진비엔날레, 아르코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센터 나비, 대안공간 루프, 토탈미술관, 가나아트 센터 언타이틀드 등에서 전시되었다.
EXHIBITION OVERVIEW
Bang & Lee는 2016년 12월 가나아트 언타이틀드(Translations of Enlightening Period.)에서 귀국 후 국내에서 3번째 개인전을 개최한다. ‘빛’을 주제로 한 일련의 리서치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설치와 드로잉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형형색색의 네온이 발광하는 가운데 흩어진 단어 조각, 평면 드로잉, 부조 형태의 오브제와 입체들이 전체적인 설치 공간에서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맺으며 ‘빛의 세기(century of light)’를 뜻하는 ‘계몽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 상식, 경험, 과학과 지식의 가치를 지향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권리와 교육을 중시했던 흔적을 추적한다. 역사적 기록물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요소들은 텍스트로 연결된 라이트 아트 설치를 통해 아직 읽기 전인 책의 목차처럼 이야기의 단서를 제공하며 관람자 나름의 번역과 새로운 해석을 기다린다.
듀오로 활동하는 이들은 2012년 5월 인사미술공간(Nonzerosum Society)과 2014년 3월 대안공간루프(Friendship is Universal)의 전시에 이어, 삼부작(trilogy)을 구성하는 작품의 개념과 내용을 어떤 퍼즐의 조각처럼 짜 맞춘다. 이번 전시에서도 조명 설치들과 함께 Bang & Lee가 실험해 온 스토리의 재구성이 협업의 연대기라는 연속선의 한 점을 지나고 있다. 협업과 우정, 공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설치의 공간에서 재현하는 방식을 택하면서도 단순한 라이브나 순간성, 상황 연출에 의한 반응적 효과에 치중하지 않는다. 아직 진행 중인, 그리하여 언제나 미완성인 설치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무한 루프와 같은 이들의 테스트와 시도는 원본과 번역물 사이에 놓인 브리지와 같다.
VIEW POINT
’Supermacht!!(수퍼파워!!)’, ‘Party & Bullshit!!(파티와 허튼짓!!)’, ‘BA BAM~(빠 밤~)’의 네온 불빛과 파편들이 벽면에 가득하다.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동하는 힘이 때로 쓸모없는 결과를 낳을 때, 그것의 영향은 일부 작은 영역에 예기치 않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특히 동물의) 똥’을 뜻하는 글자들은 부식된 채널에 매립되어 전시장 중심에 자리한 ‘킬 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지위나 신분의 높이를 상징하는 것에서부터 오물을 피하기 위해 높아진 굽은 하이힐 패션으로 발전했겠지만, 이 신발을 신는 것은 불가능하며 신발 위에 올라서는 것도 거의 서커스에 가깝다. 어쩌면 초핀(chopine, 16~17세기 왕실과 귀족사회의 여성이 신은 높은 구두)의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두 명 이상 하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준비와 계획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은 아닐 것이다. 언뜻 보면 매혹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결하고 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치스럽다 못해 과대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치장은 ‘A strategy to avoid shit(똥을 피하기 위한 전략)’ 자체가 모순이며, 또 이런 전략이 숨기고 있는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똥들 사이에도 강렬한 빛을 내뿜는 것은 아랍어로 쓰인 최초의 철학 소설 제목이다. 12세기 안달루시아 출신 모슬렘 철학자 이분 투파이(Ibn Tufail)가 쓴 ‘Ḥayy ibn Yaqẓān(Alive, son of awake, 살아있는, 깨어있는 자)’의 원제이다. 이 책은 ‘The Self-Taught Philosopher(독학 철학자)’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파되었고 계몽주의 시대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효시가 되었다. ‘깨어있는 자’를 마주 보는 반대편에는 왁스 태블릿과 스타일러스가 있다. 이 비어 있는 판(Tabula rasa)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지만,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기에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글처럼 읽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기록의 전통에서 살펴보면 입력 장치나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기록이란 거의 영구보존이 가능하다. 오늘날 ‘타뷸라 라사’ 개념을 담고 있는 이분 투파이의 소설을 퍼블릭 도메인에서 내려받아 언제든 태블릿(컴퓨터)에서 전자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간편한 디지털 기억 장치는 왁스 표면에 얇게 긁힌 자국보다 덧없다.
각양각색의 언어로 이루어진 조명 글자들은 오랜 이야기를 압축한 몇 단어의 힌트가 되어 반짝인다. 마치 스크린 위에 나타난 하이퍼링크처럼, 다른 위치 또는 다른 파일로 연결된 강조(highlight) 표시로 드러난다. 활성화된 섬네일 이미지를 클릭하면 더 많은 페이지와 더 큰 그림이 펼쳐짐을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번에 다 보여줄 수 없기에 다소 숨겨져 있지만, 그렇다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이미지는 압축되어 있고, 텍스트는 번역을 요구한다.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를 조합하는 것은 관람자의 선택이다.
어떤 번역자(Some translator)
2012년의 약속(promise) 기억해줘/기억할게(remember)
‘Darkness has never won against light(어둠은 절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작가 노트와 드로잉 북에서 발췌하여 펠트로 새긴 작업 중 하나였다. 모터로 작동하는 스탠딩 램프에 얼기설기 매달린 글자들은 회전하는 가운데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곧 광원의 중심에서 멀어져 흩어진다. 그러나 끊임없이 회전하는 운동의 축에서 원형으로 연결된 텍스트 메시지는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며 마치 피드백을 그리는 것처럼 순환한다. 전등갓에 매달려 있던 글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너덜너덜해진 탓에 그 글자들은 다시 거울 표면 위에 부착되었다. 이제 거울에 고정된 문장들은 한 조각씩 따로 떨어져 스터디 연작(Transparent Study, 2008 - 2016) 책장에도 늘어서 있다. 가끔은 거울 표면의 먼지를 닦아내고 펠트 천의 빛바램을 털어 내며 장소와 시간이 변함에 따라 어쩌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텍스트를 선택하여 바꾸기도 할 것이다. 마치 책장의 책을 갈아 끼우듯, 정보를 습득하고 지식을 넓히는 과정에서 업데이트는 수반된다. 복잡한 구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비움과 채움, 망각과 기억의 과정을 반복하는 행위는 스토리를 탄탄하게 만든다. 지난 약속을 기억하는 것도 이러한 과정에서 압축된다.
2014년의 폐쇄 루프(closed loop), 혹은 무한 루프(endless loop)
“피드백 때문에 가능한 루프에서 오류가 발생할 때, 우리는 멈춰야 하지만 아무도 정지하지 못한다. 더 큰 외부의 개입이나 간섭이 없다면, 이 시스템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폐회로가 계속 순환하게 된다면, 그 끝이 없다면, 우리는 그 기계 안에서 작동하는 오브젝트로 생중계의 사각 프레임에 스쳐 지나가는 소품으로 등장할 것이다.” (작가 인터뷰)
Bang & Lee의 작업에서 무한 루프는 설치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스터디 연작과 아레나 투어 3부작(Arena Tour - Animal, Human, Machine)에서 일시적으로 번역된 오브제와 연출된 장면은 화려한 조명과 실시간 변화하는 인터랙티브 아트의 트릭에 쉽게 빠지는 관람객에게 오직 찰나의 순간만 제공한다. 자신의 모습과 주변의 풍경은 대형 화면 위로 떠오르지만 금세 멀어지고 사라진다. 여기서 일시적이란, 전시장의 물리적인 시간을 포함하며 또한 임시로 번역/해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Bang & Lee의 설치에는 녹화나 저장 기능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의 작업은 언제나 라이브이다. 모자이크 비디오처럼 이차 생산된 더미(dummy) 이미지와 데이터 프로세싱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상이 있지만, 이것들 역시 실시간 생성되는 이미지와 섞이며 교차한다. 화면에 떠오르는 장면들은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피드백 영상을 만들어 낸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포착되는 순간과 등장인물은 아직 지정되지 않았기에 순전히 관람객에 의한 ‘임의 접속(random access)’이라 할 수 있다. 끝없이 움직이는 공간과 시간 가운데 접속을 통한 개입은 이벤트 즉, 사건을 만든다. Bang & Lee의 아레나에서의 사건은 스터디의 그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동물-사람-기계의 관계가 재배치되는 공간은 선언적이지만 관점과 시간의 이동은 지연된다.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뫼비우스 띠는 더욱 복잡하고 강한 자기 유사성으로 얽힌다. 이러한 공간은 추상화 과정을 요구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에서 거대한 프랙털 구조를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를 따로 떼어 놓은 듯, 삼차원으로 뻗어 나가는 플롯 일부를 형성한다(작가의 표현대로라면 한 편의 목차나 부록, 혹은 괄호 안에 갇힌 어떤 중요한 것을 지칭하는 행위이다). 차이와 반복은 이 미묘한 행위에서 구별된다. 설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Revolution’은 ‘혁명’만을 뜻하지 않는다. 세상이 더욱 복잡해지고 불규칙해짐에 따라 이들 나름 찾고자 하는 규칙과 질서는 그 혼돈의 배후가 지배하는 현상에서 반복되는 패턴의 확장과 회전(revolution)이라는 성질로 나타난다.
2016년의 빛, 말(light, word)
텍스트가 만드는 그림자들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기에 정확히 무엇이 서술되어 있는지 대부분의 바쁜 관람자는 내용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엄청난 정보를 가진 텍스트는 초당 수십 장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 이면의 어떤 메시지나 암시를 던지기 위해 임의로 선택한 글은 점점 더 짧아지고 이제는 몇 단어의 조합으로 전시장 바닥과 벽에 늘어서 있다. 그간 제어기술을 바탕으로 LED, 광섬유, 네온, 할로겐 등 여러 광원을 사용하여 연출한 설치 공간에는 프로젝션 모니터와 스크린의 백라이트 자체도 조명처럼 등장한다.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디지털 사용 능력)에 기반을 둔 이러한 라이트 아트도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익숙하지만, 조명 제어나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통해 가공된 장면이나 허구적인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지는 않는다. 빛의 스펙트럼을 분산시켜 때로 이미지를 흐릿하게 하거나 더욱 강렬하게 만들기도 하면서 번역 불가능한 것을 그냥 두기로 한 것처럼. Bang & Lee의 초기작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태초에 빛/말씀이 있었고(Let there be light/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이것은 여전히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지난 전시들에서 작가 스스로 ‘예술가 되기(becoming-artist)’를 반복하며, 때로 ‘탈출 예술가(escape artist)’로 어떤 출구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위기의식을 나름의 유머로 풀어낸 듯하다.
ARTIST NOTE
전시를 준비하는 것이 어색하고 미안한 요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가운데 연말을 맞이하여 소소한 전시를 마련한다.
거짓과 위선,
혼돈과 어둠의 시기에 소외되고 상처받은 시간을 조금은 치유할 수 있다면.
빛이 되어주는 존재와 희망의 메시지가 어딘가에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증인이 될 수 있다면.
그 순간을,
그 이야기를,
한 조각이라도 번역하고,
또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기억해 내고 기억하고 싶다.
그간 제작해 온 형형색색의 조명 작업, 드로잉, 조각 등 설치를 이루는 소품들이 유머 있고 따뜻한 이야기를 스스로 전달해 주기를 바란다.
곱씹어 말할 수 없었고,
곰곰이 쓸 수도 없었고,
제대로 읽히지도 않았던,
시간에 관해
짧고 서툰 몇 단어의 그림들로 던져 놓는 것이 옳은 것인지.
거짓말을 들었을 때.
위선자의 민낯을 보았을 때.
증명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때.
지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인지.
전시를 준비하며 묻고 또 물었다.
지난 시간 동안 ‘친구’와 ‘(협)업자’ 사이에서
어떤 출구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을 고민한 흔적들이
아직 미완성의 실험을 지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언어의 한계와 번역의 오류에 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듯
전시장에는 한글과 영어, 프랑스어와 독일어(유학 시절 습득한 언어), 한자와 아랍어에 이르기까지 여러 언어로 번역된 결과물이 설치될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읽지 않을 것이고
오프닝이나 파티에 나타나 무미건조한 말을 주고받을 것이고
오늘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두운 공간에 한 줄기 빛을 밝히는 시기(enlightening period)가 언젠가 도래하기를 기대하며 그간 엉뚱하게 소화해낸 잔여물이 단지 배설물로 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다음을 향해 가는 비움과 채움, 소등과 점등의 일상 가운데 무언가 놓여 있음을.
그 순간에 새어 들어오는 빛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까.
이 야만의 시간에.
2016.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