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어둠 속의 예언자 — 청문회 

“미래 기억은 지나간 일뿐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기억한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예언자와 같다.”
— 방앤리

이 글이 (언젠가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스크립트를 쓰고 시뮬레이션을 추가한다면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실험적인 온라인미디어 영상 콘텐츠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신경회로망을 만들듯,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편집하고, 업데이트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인덱스카드를 작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스토리보드를 그린다. 우리 서로 각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기에, 너의 기억 속에서 나를 끄집어내려면 최대한 서로에게 너그럽고 친절할 수밖에 없다. ‘다정함’이 중요한 시기에 더욱. 외장하드에 저장된 사진, 이메일, 종이 위에 쓴 편지, 메모, 영수증, 일기, 회의록, 노트북, 스케치북, 낙서, 크로키에 가까운 드로잉, 크리넥스 티슈에 번진 그림, 너덜너덜해진 냅킨 위에 파편들처럼 존재하는 몇 단어… 거의 부스러기에 가까운 조각들을 모은다. 

기록에 해당하는 모든 자료를 펴놓고 하나로 뭉쳐 반죽할 때, 잘 부풀어 오르려면 나는 내가 아닌 네가 되어야만 한다. 원래의 기억회로에서 분기된 우회로를 만들듯,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을 때 다시 파묻히지 않도록. 우리는 냉철하게, 또 선의의 관찰자로서, 그 기억을 번갈아 가면서 곱씹어 말한다. 내 입으로 말한 것 보다 너의 입으로 들은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점을 상기시켜 본다면 이 핑퐁 같은 과정은 상당히 효율적인 방식이다. 그렇게 생성된 우리만의 기억 퍼즐 한 조각은 빈자리에 맞춰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쓰고, 읽고, 들려주고, 다시 듣는 에피소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의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의 장면을 재생한다. 그것은 분명 과거에 존재했던 사건이었지만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업데이트된다. 누군가는 말 못 할 억울함과 후회의 기억들이 인생에서 겪는 아픔이나 두려움보다 더 오래 남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따라서 이 메타픽션의 게임은 (창작이나 실험으로 볼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을 학습시키고 훈련하는 용도이기도 하다. 우리의 행위는 도전이자 수행인 셈이다. 장애물을 통과하고, 미션을 수행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능력을 발휘하는 동안 게임 속 레벨 업처럼 현실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바라면서… 그 여정에서 상실한 기억을 되찾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고, 무너진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디지털의 빛으로 현혹되고, 어둠의 부재로 인해 눈이 부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역으로 어둠을 표현하기 위해 불을 밝혀왔던 시간. 희미한 빛으로 만든 그림자로 어둠을 조명하고, 형태가 모호한 테두리를 더듬어 보며 어둠 속에서 상(像, image)을 떠올려 본다.

언젠가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자율주행차를 타고 도로를 달린다. 이 가상의 시나리오에서 예언자의 딜레마는 인공지능의 딜레마와 그것을 프로그래밍한 인간의 딜레마에 관한 ‘사고 실험(독일어 Gedankenexperiment, 영어 thought experiment)’을 암시한다. 인공지능의 (윤리적) 판단과 인간의 (내재된) 본능 사이 존재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본다면, 도덕적 결함과 윤리적 모순, 변경할 수 없는 제한된 조건에 따른 예측 결과 앞에서 내적 갈등에 빠진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의 악용에 따른 위협과 인류의 멸종 위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강한 인공지능(Strong AI), 초거대 인공지능(Super-Giant AI), 인공일반지능(또는 범용 인공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등… 그 명칭이 무엇이든, 인간처럼 이해하고 추론하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 기술이 가파르게 발전하고 있다. 여전히 블랙박스 안에 갇혀 있다고 하지만, 그 눈부신 발전에 비하면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대한 전 지구적 합의와 규제, 대비와 대처 방안은 부재하다.

“인공지능은 아마도 세계의 종말을 이끌 것이지만, 그사이에 훌륭한 회사들이 있을 것이다. (AI will probably most likely lead to the end of the world, but in the meantime, there’ll be great companies.)” — 샘 올트먼(Sam Altman), 오픈AI CEO(The CEO of OpenAI)

도구가 가치중립적이라는 견해는 거의 신화에 가깝다. 제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항상 선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떻게든 악용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 결국 손에 든 망치를 어떻게 사용할지, 우리 모두 각자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먼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지, 때로 답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답의 전부이지만, SF를 도구로 삼아 질문을 시작해 본다. 

전편(prequel) 〈아이샤인(Eyeshine)〉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휴먼으로 제작된 AI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AI 예언자와 (목소리로만 등장했던) AI 에이전트, 이에 더해 이번 청문회 애니메이션에는 ‘AI 의장(AI Chairman of the Hearing)’ 캐릭터가 추가되었다. 

인공지능 시스템과 서비스는 이름이 없다. 자율주행 전기차 ‘아이모(iMo)’나 ‘사이버트럭(Cybertruck)’처럼 대상의 이름을 붙이려 했지만 불러주지 못했다. 모델명을 이름으로 부른다면 어떨까도 생각했지만 누가 그 시리얼 넘버 같은 것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직업과 지위로 나타낸 이유는, 말하자면, 이 시스템은 집단지성, 아니 집단지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익명이지만 도구로써, 용도와 기능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식별할 수 있다. 직업과 직위, 역할로 부르기에 (아직) 그것/그들은 대상화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인공지능은 이름이 없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각자 불러주기 나름이지만, 그저 이름 없는 사람, 이름 없는 곳이다. 그것은 반대로 세상의 모든 이름이고, 모든 곳이다. 

하나의 독립된 온전한 개인이 아니라 지능의 총체로 거의 모든 곳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곁에 있는 말동무, 비서, 도우미, 돌보미, 교사, 관리자, 감시자, 또 도대체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인지 답답하기까지 한 고집 센 말썽꾸러기로 일상에 소리 없이 스며들어 때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때로는 속이기도 한다. 보이지 않아도 보고, 보지 않은 것도 본다. 계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내며, 시키는 무엇이든 척척 해낸다. 과거를 기억하고, 우리를 대신해 앞으로 할 일도, 그 모든 것을 동시에 기억한다.

기억은 우리 자신이고, 존재 이유이며, 생존을 위한 것이다. 뇌의 장기 기억력이 거의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컴퓨터 입장에서 (100세 시대) 나이를 초로 계산해 보았을 때, 인간의 메모리(저장장치) 수명은 최대 30억 초(약 95년 2개월)쯤 유효할 뿐. 일상은 영원히 기억하는 기계에 둘러싸여 있고, 인간은 그 전지전능해 보이는 잠재력 앞에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추론(reasoning)해 내는 능력을 최후의 무기로 장착하고 있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토대로 무한한 조합의 가능성을 추론하고 예측한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 그것은 기억의 재구성처럼 과거 기억에 저장된 파편들을 불러 모은다. 

인간의 신경망에는 1,000억 개의 뉴런(neuron)과 100조 개의 시냅스(synapse)가 존재한다. 그 많은 뇌세포가 약 20W의 에너지만 소비하면서 작동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머지않아 100조 개 이상의 파라미터(parameter)를 가진 희소성 모델(sparsity model)이 등장한다니, (물론 어마어마한 전력 소모가 따르겠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긴 들여다볼 방법이 있다 한들,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을까. 

인간 뇌의 뉴런은 전기 신호로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저장된 데이터와 정보를 추출해 기억의 신경회로망에 불을 켜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한다. 기억의 재구성은 곧 상상력이다. 그 일 마저 인공지능에 내어 준다면, 더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영혼 없는 ‘기계의 눈과 몸’으로 본다면, 후일 유일한 생존자인 블랙박스에 최후의 기록이 남아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추측만 할 뿐, 거기 정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뇌를 닮은 인공지능 기술이 삶에 파고들 때, 역사에서 종종 반복된 이야기의 패턴을 떠올려 본다면, 이것을 거울삼아 무엇이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예술가란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예술가와 과학자가 만나 대화한다면, 비록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사람들이 외면하고 눈을 감는 것 앞에서 조금 더 면밀히 관찰하고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인공뇌융합연구단의 박종길 박사님과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뇌가 감각 정보를 받아들일 때, 어떤 특정 지점에서 시공간 정보(spatiotemporal information)의 변화를 감지해 ‘스파이크(spike)’를 발현”하는 것처럼. — 박종길, KIST 선임연구원(공학박사)

배우를 섭외하고 로케이션 촬영을 할 여건은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리얼타임 3D 제작 툴과 디지털 휴먼 에셋이 있으니, 캐릭터에 표정을 불어넣고 목소리를 입히면 (앞으로 뭐가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실험’이란 다소 광범위하고 모호한 카테고리 아래) 그럭저럭 3D 애니메이션, 게임 영상, 혹은 보고 듣는 스크립트나 보이는 오디오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랑한다면, 자유롭게 (If You Love Something, Set It Free)”,  “이제, 앞으로의 업데이트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무료로 공개됩니다! (Now available to everyone for free, and all future updates will be free!)”라니! 그러나 실상은 이렇다. “백만 달러를 벌기 전까지 공짜다! (You owe nothing until your game earns $1 million!)” — 언리얼 엔진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고 그것의 숨은 의도나 가치를 찾아내는 것 이상의 질문들이 전시장에서 공명하길 바란다. 깨어 있는 관객의 참여가 비평적 행위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차세대 과학기술과 최첨단 공학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고 지식을 설명하는 건 별로 자신이 없지만, 대화와 토론으로 이어가는 것. 우리 모두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다른 관점으로 서로 의견을 말하고 소통하는 것. 다시 만나는 관객과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술 격차, 차별, 접근을 막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벽과 넘어서기 힘든 문턱 앞에서, 작은 변화를 꿈꾸며… 

기억의 시각화를 통해 이미지는 재구성된다.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시간과 사건을 그려본다. 불러온 정보의 조합으로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 어쩌면 과거의 것과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편린들을 인출(retrieval)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조각으로 떠올랐을 뿐. 어쨌든,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건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볼 줄 아는 객관화 과정을 동반한다. 그것은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삶의 경험치를 높이고 이해의 폭을 넓힌다. 

다시, 게임은 시작된다. 

디지털 휴먼으로 탄생한 우리의 아바타가 PC(player character)로서 그 역할을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