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한숨) TV에 나오지 않는, 바퀴 달린 혁명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을 거야, 나오지 않을 거야,
나오지 않을 거야, 나오지 않을 거야.
형제여, 혁명은 재방송 되지 않을 거야.
단지 라이브일 뿐.

– 길 스콧-헤론(Gil Scott-Heron),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1970

하지만 그때까지 너와 내가 알듯 파티와 허튼짓을 할 것이고, 또 파티와 허튼짓을 할 것이고, 파티와 허튼짓을 계속할 것이라는 걸…
그중에는 혁명이 오기 전에 죽는 이도 있겠지.

– 더 라스트 포엣츠(The Last Poets), 혁명이 도래할 때<When The Revolution Comes>, 1970

I. 시간 – 현재 (Time – the present)

1년 사이 작업 제작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작은 기여를 모아 그것들을 중요한 무언가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설치는 기본적으로 무대와 그 구성에 따른 라이트 설치의 변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변형된 설치의 공간에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실시간 참여가 라이브로 프로젝션 된다. 바퀴 달린 혁명/공전(REVOLUTION)과 RGB로 반짝이는 색색의 조명은 원형 무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구경할 수 있는 자리와 캡처되는 스팟이 무수한 모자이크 데이터 이미지와 섞여 스위치 되는 영상이 공간을 둘러싼 순환 구조의 틈을 채운다. 무언가 진행 중이며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순간은 끊임없이 현재에서 반복된다.

II. 라이브! 생방송 뉴스가 아닌 (Live! Not on-air news)

무대 위 조명을 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언제나 ‘라이브(live)’이며 ‘재방송(re-run)’되지 않는다. ‘파티와 허튼짓(party and bullshit)’을 하며 TV, SNS, 그 외 다른 형태의 오락거리에 빠져 있는 동안 밖에서는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는 하찮은 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성공한 혁명을 신화로 만들어 버리는 역사를 쓸 수 있다. 이러한 순간은 매일매일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다.

III. 공전, 축을 중심으로 한 회전 (Revolution, about the axis of rotation)

‘Revolution’의 어원은 ‘회전하다’, ‘굴리다’를 뜻하는 라틴어에 ‘다시’라는 접두사가 더해져 ‘한 바퀴 굴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다’라는 의미이다. 역사의 기관차, 혁명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바퀴는 정교한 장치로 맞물려 있고 무수한 톱니(gear)들과 서로 엮여 있다. 발전기(generator)와 전동기(motor)는 속도를 내면서 바퀴를 굴린다. 어느 순간 계속 회전하며 전진하는 힘은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지만 노선이 변경되기 전까지 이 속도와 굴레 안에서 정지하지 못한다. ‘프로덕션’이라는 프레임에서 이 기관차는 그런 운명을 맞이하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도 역시 프로덕션이라는 산물의 일부여서 스스로 나사(screw)를 조이며 예술가 되기(becoming-artist)를 연습(practice)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예술가 만들기(making-artist)를 하는 곳에서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 변화를 꿈꾸고 있다.

IV. 무한 루프, 거리 없는 추진 (Infinite loop, propelled with no distance)

거리, 시간, 사색의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우연성과 불확정성, 그리고 순환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반복성은 광범위하지만 약한 연결을 만들어 낸다. 유동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는 정보자본주의 시장에 ‘자동축적’이라는 거대한 잠재력을 불어넣는다.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의 엔진이 이 힘으로 가동되고 있다면 RPM(revolutions per minute: 엔진, 음반의 회전수 척도)의 수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회전은 빠르지만 충분한 거리와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초고속/실시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에는 발열량이 증가하고 노이즈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프로덕션도 이러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 여유 공간이 없을 때 추진되는 프로젝트는 방향성을 잃고 관계된 것들 사이에 중력을 무너뜨리며 과부하에 걸리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프로덕션은 상호의존적인 환경에서 형성된 궤도의 한 점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곳으로 질주한다. 새로운 프로덕션은 이 마이크로화된 네트워크 세상에서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하지만 반복되는 과정에서 미묘한 차이가 발생하고 그 빗겨남은 어떤 틈을 형성한다. 벌어진 틈은 시작과는 다른 거리를 생성한다.

V. 쇼타임, 달빛 아래서 (Showtime, au clair de la lune)

영화가 끝날 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많은 사람들의 기여에 관한 일종의 존경심을 표하는 나름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언가 더 힌트가 나오거나 다음 예고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의 순간이 스크린 위로 흘러간다. 물론 각종 로고와 저작권 표시를 끝으로 극장 안의 조명이 켜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고 내부와 외부를 관통하게 하는 실험을 거쳐 나선형을 그려나가는 순환적인 구조에서 제4의 벽(the fourth wall)은 이미 허물어져 있다. 후기 산업사회의 생산품으로 만들어낸 설치의 시각적 지시성과 대상의 구체성은 계획된 프로덕트 디자인과 연마된 기술적 실현능력을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흐릿해 보인다. 이러한 설치의 공간에서 우리는 설치물의 위치를 임의로 발견하거나 스스로 위치를 자리 잡을(positioning) 수 있다. 이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어떤 예술품이 아니며 작품을 감상하도록 하는 응축된 시간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늘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찰나임을, 또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황이 달라짐으로써 서로 ‘자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깨닫는 것이다. 적어도 모호함은 매력적이다. 알쏭달쏭 불분명하고 막연한 것은 해석의 여지와 상상, 다름 혹은 다양성에 관해 생각해 보는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 역시 프로덕션에서는 전혀 새롭지 않지만, 끝으로 갈 수록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모호함의 연속에서 이 최소한의 개입(intervention)이 작은 참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기여에 관한 일종의 존경심을 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달빛 아래서 쇼는 곧 시작되고 금방 끝날 것이지만.